※ 2003년 8월 3일 한국정신치료학회 사무실에서, 한국정신치료학회 (당시) 허찬희 국제교류위원장이
이동식 선생님과 대담한 내용을 녹취한 기록이며, 2004년 8월 이동식선생님께서 교정을 보신 글입니다.
H 그런데 선생님이 이런 강의를 하실 때에는 외국 사람들이 그때는 딱 알아채는데 그 다음에 또 개념화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서양 사람에게 그런 것을 개념화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주면 서양의 문화적 배경 때문에 쉽게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어 보이는데 앞으로 서양 사람들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리드해줄 필요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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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는 서양 사람들의 통역이 필요하다. 내가 1977년 하와이에서 발표했을 때 질문하는 것마다 모두 Conceptual thinking이더라. 모든 질문에 대해 내가 답변을 안하고, 그것은 개념적 사고다 그렇게 답변을 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전제에 차이가 있다.
(편집자 삽입)
"The Tao, Psychoanalysis and Existential Thought," 6th World Congress of Psychiatry, Honolulu, Hawaii
H 그런데 서양 사람들도 선생님의 정신치료를 많이 접하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런 쪽으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문제를 풀어 줄 수 있는 어떤 고려를 해야 되겠는데
R 그렇지 Allan Tasman이라든지 서양 사람들에게 소개를 잘 해줄 수 있는 서양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야 된다.
H 학자들을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소개를 한다.
R 그런 모임을 갖는 것dl 좋다, 예를 들어 서양 사람 모아가지고 서양 정신치료와 도 정신치료를 토론하는 게 좋다.
H 얼마 전에 싱가폴 학회에 갔을 때 청중 한 사람이 몇 가지 질문을 하더라. 돌아와서 다시 질문을 하는데 개념에 대한 질문이 많아서, 개념을 없애야 된다고 하니까 마치 인간의 모든 활동이 중지 되는 걸로 생각하고 아주 어려워하는 것 같더라.
R 그렇지, 그러니까 William Barrett가 Conceptual Prison, 개념의 감옥에 갇혀있다. 그것을 다시 읽어보지. 서문을. 감옥을 못 벗어났다, 서양 철학도 그거다, 개념을 빼놓으면 없다 이거지. 우리는 '개념은 현실을 가리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을 봤으면 개념은 잊어버려라'라고 하는데. //도 정신치료의 경우 핵심 감정의 이해가 근본이거든, 핵심감정과 자비심, 그런데 핵심감정도 노이로제나 정신병, 어떤 정신병이라도 다 그걸 다루면 빨리 낫고 재발이 안 된다. 정신분열병을 예로 든다면, 해방 직후 지리멸렬하고 이해도 할 수 없는 그런 환자를 첨 봤거든, 청량리 뇌병원에서 입원치료를 해도 안 나은 환자인데 병실에서 서서 2-3분 인터뷰했거든. 첫 기억이 자기가 서너 살 때 자기 엄마가 한복을 방바닥에 옷감을 놓고 만들고 있는데 옆을 지나가니까 엄마가 못 지내가게 하더라 이거야. 거기에서 배척감을 느낀 거라, 그게 해소가 안되어 가지고 병이 났어. 환자 자신이 그 말을 하고 훽 정신이 돌아오더라. 아주 말을 조리 있게 하고. 만성 환자라도 커뮤니케이션이 되면 싹 증세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communication이 근본이다. 정신병인 경우 환자가 말하는 증상 그게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다뤄야 돼. Frieda Fromm-Reichmann의 Principles of Intensive Psychotherapy (1950) 거기에도 나오지만 dynamic과 content 증상이라는 게 contents거든, dynamics라는게 감정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감정을 치료하면 무슨 증상이든지 다 한꺼번에 없어진다, 정신병이라도. 말하자면 오해가 풀리면 싹 모든 게 다 풀린다. 그러니까 감정을 치료해야지. 서양 사람들은 증상을 가지고 자꾸 interpretation 한다. 적개심과 사랑 받고 싶은 것 그것을 다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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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도는 십우도(十牛圖), 목우도(牧牛圖)라고도 부르며 참선(參禪)에서의 각(覺)의 과정(過程)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송광사의 십우도 벽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