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6일부터 5월 21일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162회 미국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APA) 학술대회에 다녀왔다. 우연히 학회 사무실 3층에서 보았던 30여 년 전의 미국정신의학회 프로그램은 손바닥만한 소책자에 50쪽도 안되는 빈약한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전 세계에서 3만8천명 이상이 등록을 하는 세계적인 학회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세계 정신의학을 이끌어가는 나라가 미국이다 보니 세계의 동향을 살피자면 미국인이 아니어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외국 학회지만 미국은 이제 우리가 너무 자주 방문하는 나라가 되어 관광에 대한 호기심은 전무하였고 그야말로 학술적인 목적만을 위한 학회가 되었다. 같이 가는 전공의들에게는 동문선배들이 보태준 여행비이기 때문에 공금에 해당되며 따라서 개인적인 취미 등에 사용하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국은 변화가 없을 텐데 날이 갈수록 미국을 볼 때 신기함이 감소하는 것을 느낀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다양한 자동차의 종류를 보고 눈이 바빴는데 이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었다. 그 신기하던 건물이나 상점들도 이제는 서울과 별 차이를 못 느끼게 된다. 최근 10년 사이에 우리나라가 부쩍 성장한 것 같다. 7년 전 미국의 Best Buy 가전제품 상점에서 Sony TV 옆에 삼성 상표가 붙은 PDP TV를 보고 감격하였다가 귀국 길에 애국심을 발휘하여 진열되었던 삼성 TV를 사가지고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미국 일류호텔이나 공항은 삼성과 LG TV 일색이다. 하긴 몇 달 전 한국에 왔던 클리블랜드 정신분석센터의 프로그램 책임자인 Dr. Lightbody도 삼성 디카를 갖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었다. 전공의들은 돈을 아끼느라 국적기를 못 타고 외국항공사를 이용했다. 그들이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먹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한식은 자기 돈 내고 먹을 수가 없었다.
미국은 테러와 경제 불황 등으로 사회적으로 경직되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 입국 심사인데 우리나라와는 비자면제 협정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심사를 지나치게 까다롭게 한다. 열손가락 모두 지문을 찍게 하고 홍채검사를 하고 학회에 왔다고 하니 컨벤션센터 이름이 뭐냐고 묻는가하면 또 초청장이 있냐고 따진다.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었더니 다음에는 꼭 가지고 다니라고 주의를 준다. 따지려다가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냥 나왔는데 외국인에 대해 전과 달리 여유가 없어지고 배타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불친절하게 대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은 아닐 텐데 위에서 하도 닦달하니 밑의 실무진에서 그런 현상이 생기지 않나 추측된다. 한편 학회에서는 현장등록 학회비가 950불인데 회원가입을 하고 회원으로 등록하면 가입비 160불에 회원등록비 355불로 515불이면 된다. 작년에 회비를 안내어 새로 회원으로 가입하려고 했더니 한국에서 의사라는 증명서를 보여 달란다. 재작년에 가입했었는데 기존 자료가 있나 보라고 했더니 다행히 있었다. 그 당시 가입할 때는 증명서 보잔 소리가 전혀 없었었다. 일처리가 이렇게 경직되는 증거는 포스터 접수에서도 나타난다. 올해 포스터는 한국의 경우 반 정도 reject 당한 듯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과거에도 APA가 포스터를 reject하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단지 학술위원회의 결정인지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참가를 독려하면서 포스터를 reject하는 것은 손발이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이다.
총회는 예전처럼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전임 회장들을 소개하고 기립박수하고 powerful한 회장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연설은 언제나 멋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들어보면 사명감을 강조하고 단합을 외치는데 이유는 industry와의 관계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란을 당해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AKAP에서 들은 얘기로는 APA가 작년에 공화당 의원의 고발로 inspection을 당했다고 한다. APA에서도 surgery쪽은 우리보다 10배 이상 규모가 큰데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냐고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 industry 부스에서는 볼펜 한 자루 구하기가 힘들었다.
참가자들의 공통된 의견이 이번 학회는 정말로 들을 게 없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노벨상 수상자나 영화 뷰티플마인드의 실제 주인공, 여배우 브룩 쉴즈 등이 나타났었는데 이번에는 맥코믹이라는 이름도 모르는 배우 한사람만 나타났다. 학회의 내용은 원래가 백화점 식이면서도 눈에 띄는 주제가 몇몇 있어 세계적 학문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때문에 자살이라는 주제가 몇 개 있었고 알코올협회에서 지원을 하여 알코올관련 심포지엄 몇 개가 눈에 띌 뿐 전체적인 학문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정신치료 등 들을 만한 심포지엄은 모두 CME course에 집어넣어 오전이나 오후를 들으려면 180불을 따로 내야 했다. 그 중 인기 있는 주제는 금새 다 팔려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다행히 우울증의 단기 정신역동적 지지 정신치료(Short-term Psychodynamic Sup- portive Psychotherapy: SPSP)라는 course를 들을 수 있었다. 평소 우울증의 비약물학적 치료의 진료지침을 마련하는 중이었고 그 중 우울증의 정신치료에 대한 진료지침을 개발하기 위해 조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다행히 입맛에 딱 맞는 주제라 기쁜 마음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네덜란드의 Dr. de Jonghe를 필두로 한 group의 심포지엄이었는데 16회의 단기치료이며 모든 정신치료 이론을 바탕으로 한 지지치료였다. 아직 영어로 된 매뉴얼이 없다고 하였는데 발표하는 것을 듣고 실습을 해보니 지금 우리가 하는 정신치료와 유사한 점이 매우 많았다. 이 치료법의 핵심은 supportive therapy이다. 보통 conflict theory를 바탕으로한 치료에서는interpretative approach를 하여 insight가 생기고 personality change가 오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develop- mental theory를 바탕으로 한 이 supportive approach에서는 personality change가 오고 나서 insight가 생긴다고 한다. “모든 치료는 supportive다” 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며 전공의들의 정신치료가 drop out 잘 되는 이유가 너무 analytic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supportive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supportive하게 되려면 analytic한 것을 충분히 익힌 다음이라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정신과 전공의들이 다른 직종 출신의 치료자보다 공감이 느리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EMDR에서는 창시자인 Dr. Shapiro가 최근에와서 EMDR의원리는 Adaptive information processing theory를 근거로 하며 모든 정신치료의 방법을 integration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 역시 처음 EMDR을 접했을 때 단순한 behavior therapy나 cognitive therapy보다는 dynamic therapy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Dr. Shapiro가 지금은 EMDR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trauma만 지우는 행동치료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의 trauma로 인한 현상은 과거 처리되지 않았던 trauma가 현재의 사건이라는 trigger로 인하여 재발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에 아무리 그런 사실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알려줘도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라고 한다. 과거의 어린 시절 trauma를 EMDR로 다루는데 즉, bilateral stimulation을 하여 frozentraumaticinforma- tion을 reprocessing하는 것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핵심감정을 다루지 않으면 치료가 안 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한다. SPSP나 EMDR이나 이동식 선생님의 가르침이 일맥상통한다. 나는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하여 우울증의 정신치료 진료지침을 마련할 예정이다.
신종 인플루엔자 염려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갔던 동료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니 아무도 신종 인플루엔자에 신경 쓰지 않아 슬그머니 마스크를 집어넣었다. 일본은 아예 국제학회에 참석을 못하게 하여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귀국하니 보건소에서 아무 이상 없냐고 2번이나 확인 전화를 하였다. 우리나라 보건소가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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